한 챕터를 마치며.

한 챕터를 마치며.

One chapter has ended, beginning an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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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5년 동안 함께했던 식스샵에서의 마지막 근무를 끝냈다. 다른 어떤 작별보다 어려운 결정이었으며 그간 느낀 희로애락 갖가지 감정이 요 며칠, 마치 플래시백처럼 머릿속을 휘휘 스치는 중이다.

결론은 회사가 더 큰 미션을 발견해 달려 나가는 과정에서, 나의 미션과 일치 정도가 달라지며 서로를 위해 아쉽게 헤어지는 상황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다. 이제 회사는 새로운 비전을 향해 더 빠르게 달려 나갈 것이고 나는 그들의 가장 열렬한 팬으로서 이를 응원할 생각이다.

이렇게 내 커리어 중 가장 강렬했던 한 챕터가 끝을 맺었다.

아래 이어지는 글은 독자를 위한 메시지나 배움을 담은 글이 아닌, 그저 다음 챕터로 나아가기 전 나름의 맺음을 위해 작성해 보는 글이라는 점을 알아주길 바란다.


미션

비교적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했기에 군 복무 기간을 제외하면 벌써 17년 정도 디자인 혹은 IT 분야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 중 커리어 초반 에이전시에서 경험을 쌓던 5년 가량의 기간을 탐색기라 한다면, 현재의 커리어 방향성을 수립한 시기는 2011년 즈음이다.

계기는 후배들의 취업 상담이었는데, 그들의 고민이 '하고 싶은 일'보다 회사의 규모에 포커스 맞춰진 것에서 처음으로 의문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기업의 규모에 따라 보상의 크기도 극적으로 차이나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그들은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앞으로 사회에 나올 후배들이 기업의 크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 하는 나만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때의 고민을 적은 게 나의 첫 블로그 게시글이 되었다.)

고민을 이어가던 중 당시 빠른 성장을 이루며 주목받던 한 기업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막 10만 자영업자가 입점한 앱으로 소개되던 '배달의 민족'이었다. 지금에야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디자이너 출신인 김봉진 대표님이 창업 초부터 독자적인 기업 문화를 일구며 업계에서 회자되고 있었다.

**'만약 배달의 민족 같이 독자적인 기업 문화를 보유한,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가 1,000개, 10,000개로 더욱 늘어난다면 후배들이 지금보다 더 많은 선택지를 두고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질문은 이후 내 커리어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 디자이너인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아직은 모호하던 때, 즐겨보던 Wired 매거진에서 이런 기사를 보게 되었다.

Y Combinator Is Boot Camp for Startups.
와이컴비네이터는 스타트업을 위한 부트캠프입니다.

지금은 모두가 잘 아는 'Y Combinator'를 알게된 계기였다. 내가 고민하던 주제에 대한 선명한 답변을 폴그래험과 와이컴비네이터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스타트업이란 키워드에 대해 관심을 키워가던 중, 국내의 성공한 창업자와 VC가 힘을 모아 한국형 벤처 인큐베이터를 설립했으며 디자이너를 찾는단 페이스북 게시글을 발견했다.

주저할 이유가 없었고, 이주 뒤 나는 패스트트랙아시아에 합류했다.

'좋은 기업들이 더 많아지는 것을 돕기 위해서' 말이다.


스타트업

패스트트랙아시아 개발팀에 합류한 뒤, 두 번째 인큐베이팅 기업 퀸시의 첫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었고, 이 경험이 내 디자이너로서의 직업관을 크게 변화시켰다.

우선 클라이언트가 아닌 고객과 직접 맞닿은 제품 경험을 설계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깨달았고, 열정 넘치고 뛰어난 동료들과의 긴밀한 협업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알게 되었다.

지금은 익숙해진 '프로덕트 팀', '프로덕트 디자이너'의 협업/업무 방식을 비교적 앞서 경험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무엇보다 성장과 생존 사이에서 항상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스타트업 환경에서 압축된 즐거움과 고통을 여과 없이 체험한 것이 시야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좋은 기업이 더 많아지도록 돕는다'는 나의 미션에 충분히 가까워진 것 같지 않았다. 기업의 여정이 험난하고 길기 때문에, 최소한 몇 년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스타트업의 일원이 되는 것은 나의 경험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미션 달성에 적합한 방법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몇몇 동료와 함께 초기 스타트업의 런칭 프로덕트 제작을 돕는 '카인다랩' 스튜디오를 창업했다.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더 많은 스타트업에게 시작 단계에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것에 있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이후 카인다랩이란 이름으로 우리는 여러 스타트업의 초기 제품 구축을 도왔다. 클라이언트-에이전시의 관계가 아닌 창업자와 초기 멤버의 관계로 한 팀처럼 너나없이 모두 쏟아부으며 제품을 만들어가는 충실한 시기였으나 2년도 못 채우고 커다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초기 투자 규모가 큰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돈 없는 초기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사업을 영위한다는 것이 그다지 영특한 비즈니스 모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창업자를 위한

주어진 시간이 유한한 만큼 몇 명의 인력이 시간을 들여 직접 창업팀을 돕는 것엔 한계가 있다. '얕아도 넓게' 더 많은 창업 팀에 도움을 줄 방법을 찾아야했고 결론은 창업 팀을 위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후 카인다랩의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향해 걸어나갔고 나는 프라이머의 중매를 통해 당시 위지윅 쇼핑몰 빌더의 초기 제품을 만들던 지금의 식스샵 동료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그들은 함께 하던 기획자가 개인 사정으로 팀을 떠나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나는 창업자를 위한 제품을 함께 만들 새로운 팀이 필요했기에 서로의 이해가 일치했다.

이후 우당탕탕, 와장창 부딪히고 뒹구는 일들이 가득했지만 식스샵이란 제품을 함께 만들 기회를 얻은 것은 나의 미션을 달성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다.

물론 나의 미션, 노력과 무관하게 시장은 수많은 스타트업을 탄생시켰고, 이미 수많은 기업이 과거의 배민 이상으로 성장하였지만, 분명한 것은 식스샵이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하고 싶은, 자본도 기술도 없는 창업자들에게 단비 같은 제품이었다는 점과 이를 통해 수만 명의 창업자가 자신의 생애 첫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인 창업자로 시작해 멋진 기업으로 성장하는 고객들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경험 중 하나라 자부한다.


리더

식스샵이 작은 팀으로 일할 때는 그저 함께 싸우는 전우로서 손발을 맞춰 달려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다시 합류한 뒤엔 리더로서 더 많은 사람이 성과를 내도록 도와야 할, 전과는 다른 유형의 과제를 직면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너무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좀 더 현명했다면 피할 수 있었던 돌부리도 하나하나 걸려 넘어지며 배워야 했다. 한 땐, 후회란 남의 이야기만 같았는데 리더로 발을 내디딘 이후의 여러 순간은 '다시 돌아간다면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후회를 여러 번 했던 것 같다.

최선을 다했지만, 최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팀을 거쳐 간 전 동료, 그리고 지금도 열심히 달려가는 동료들이 부족한 나를 끌고 밀어주었기에 넘어졌을 때 일어설 수 있었고, 멈추고 싶을 때 한 발 더 내디딜 수 있었다. 동료들을 통해 배운 것들이 내 성장의 9할 이상을 차지한다 해도 과장이 아니다.

내 커리어의 두 번째 챕터는 '좋은 기업이 더 많아지도록 돕는다'는 밖에서 보이는 가치에 초점 맞춰진 채로 시작했지만, 식스샵에서의 경험을 통해 '좋은 기업과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란 기업 성장의 내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진 채로 마무리히게 되었다.

난 좋은 제품을 만들고 싶은 메이커이다. 그러나 좋은, 성장하는 제품이 만들어 지기 위해선 기업 내 많은 사람과 이를 둘러싼 내, 외부의 갖가지 요소들이 끊임없이 부딪히고 조율되는 과정을 거치며 적절한 긴장과 불완전한 조화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어야 하고, 그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내 커리어의 다가올 챕터는 '좋은 기업을 만드는 이들을 돕는 것' 이상으로 '좋은 기업을 만드는 것'에 관해 새롭게 얻은 질문에 관한 답을 찾는 과정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맺음

5년이란 시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잠시 떠났던 시간을 포함하면 시작과 끝 사이만 10년에 걸친 인연이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졌다.

누군가는 원망하며,누군가는 응원하며, 시원하게, 혹은 시원섭섭하게 떠났거나 떠나보내 준 동료들 모두에게 그동안 너무나 감사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To 식스샵 동료들

마지막 출근날 예상치 못한 롤링 페이퍼를 선물로 받고 여러 감정이 교차했는데, 뭉클했다 말해도 혹시 버릴지도 모른다며 PDF 파일까지 챙겨주신 배려 감사합니다. T에게도 감수성이란게 있는데 말이죠 🥲

오래오래 고이 간직하면서 가끔 지치고 힘들 때 꺼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답례로 저보다 더 보고 싶을 룽지의 최신 근황을 사진으로 전합니다.

잘 먹고 잘 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