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플레이어에서 초보 매니저로
나는 언제나 디자이너였고 제품을 만드는 건 나의 일이었다.
20세 때부터 지금껏 직업인으로 일하며 에이전시, 인하우스, 스타트업, 창업의 과정을 거쳤고 매 순간 필요한 일들을 찾아 맡다 보니 흔히 '디자이너가 하는 일'이라 말하는 것보다 다루는 일의 범주가 넓어졌고 이 또한 디자이너로서 성장하는 방식의 하나로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2019년까지 10명 남짓이던 회사가 20명이 넘고 이내 30명이 되면서, 일의 성격이 이전과 다른 형태로 바뀜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동안은 혼자 많은 일을 처리하는 것이 필요했다면 어느 시점부터 그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위임하는 것이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전에도 팀의 매니저 역할을 한 적은 있지만, 그땐 지시하고 검수하는 식으로 일하는 환경이라 부족한 손을 빌려 쓰는 것에 가까워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보다 뛰어난 동료들이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제품으로 구현해 낼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도전 같다.
아마도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경우 나와 비슷하게, 숙련된 실무자에서 어수룩한 초보 매니저로 역할 변화를 겪는 사람, 혹은 겪게 될 사람이 적지 않을 것 같아 시행착오를 거치며 얻는 사소한 배움을 틈틈이 기록으로 남겨보려 한다.
2. 일에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처음 공유할 작은 배움은 생산성에 관한 것이다.
실무자로 일할 땐 하나의 컨텍스트 안에서 연이어지는 태스크를 빠르게 수행하는 게 중요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기민하게 협업하면서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맡은 일을 빠르게 완수하는 것만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매니저 역할을 맡게 되니 매일 여러 컨텍스트의 다양한 업무가(채용 인터뷰, 직군 미팅, 팀별 미팅, 1:1 리뷰, 배포 일정, 파트너 관리, 고객사 인터뷰 등….)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고, 특히나 미팅이 엄청나게 늘었다.
이전엔 내 우선순위만 잘 고려하면 많은 게 해결되었는데 이제는 여러 동료, 팀의 우선순위를 함께 고민하여 일해야 하고, 무엇보다 내가 제때 해야 할 일을 처리하지 않거나 결정을 미루면 팀 전체의 시간을 낭비하는 상황으로 이어져 버겁고, 부담되었다.
아마 나는 멀티 태스킹이 안되는 유형이라 특히 더 고생한 게 아닌가 싶다.
비슷한 시기에 외부 미팅을 두 번이나 놓치는 일이 발생하자 더는 상황을 방치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내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일에 끌려다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먼저, 기대처럼 진행되지 않았거나 제때 처리하지 못한 일을 되짚어보며 문제의 원인을 찾았다.
당시, 미팅 등 예정된 일정은 캘린더에, 개인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은 투두 리스트에, 팀의 업무는 지라에서 각각 관리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여러 앱에 해야 할 일을 나누어 관리하다 보니 수시로 확인하지 못하여 한쪽 변경 사항이 다른 쪽에 반영되지 않아 놓치고 중복되는 일이 생겨나는 것이 문제였다.
예전이었다면 기억하고 있다 처리하면 됐지만, 지금은 모든 일을 머릿속에 담아두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을 한 곳으로 모아 수시로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요했고, 여러 옵션을 고려하다 캘린더를 활용해 해결하기로 했다.
캘린더를 활용하기로 한 이유
- 높은 접근성
- 효과적인 시각화 도구
- 알림 제공
여러 이유 중 일의 크기를 시각화 할 수 있다는 점이 캘린더가 갖는 두드러지는 특성이다, 투두 리스트는 일의 우선순위를 순서로 정의할 수 있지만 처리되어야 하는 시점까지 관리하기엔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
앞서 여러 이해관계자의 업무 우선순위가 나의 일정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언제 어떤 일을 할지 빠르게 정할 필요가 있어서 블록의 크기와 위치를 통해 업무량을 시각화 할 수 있는 캘린더가 적절한 도구였다.
거기에, 당연한 말이지만 개인 일정 외에도 팀 내 주요 이벤트를 함께 볼 수 있다는 점이 캘린더의 장점이다.
캘린더를 활용해 달성하고자 하는 것
- 중요한 일을 놓치지 않고 제때 처리한다.
- 한정된 시간 안에 처리할 수 있는 일의 총량을 늘린다.
- 하루를 회고하는 습관을 만든다.
시간은 한정된 자원이고 스타트업에선 언제나 시간이 부족하다. 모든 것을 다하려다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으니 우선순위를 잘 고려해야 한다.
또한, 총량이 같아도 몇 개의 큰 블록을 깨는 방법과 수많은 작은 블록들을 깨는 방법은 다르게 마련이다. 바뀐 업무에 걸맞은 생산성을 갖추지 못하면 결정이 늦어져 동료들의 일정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매일 일과를 마치고 하루를 회고하는 습관이 개인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는데, 회고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좀 더 자세히 얘기해볼까 한다.
3. 캘린더 활용 방법
3-1.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할 시간 확보하기
실무자로 일할 땐 익숙한 만큼, 무엇을 해야 할지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일이 진행되는 순서가 있었고 단계별 목표와 우선순위에 따라 하나하나 잘 처리하면 되었다.
그런데 초보 매니저로 일하며 가장 어려운 것은 처리해야 하는 일의 수도 많은데 더군다나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일도 많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 뭘까 고민해보니, 가장 시급한 것은 일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는 확보된 시간을 갖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기존의 과업과 새롭게 생겨나는 일 모두 어느 정도 준비된 상태로 마주하고 결정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출근 직후 30분을 온전히 오늘 해야 할 일을 정하는 데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2주 정도를 보내고 나니, 확보된 30분 가량의 시간이 하루의 업무밀도를 얼마나 높일 수 있는지 체감하게 되었다.
3-2. 빈칸 채우기
매일 아침 해야 할 일을 정하는 시간을 포함하여 팀 회의, 직군 회의, 사내 스터디, 정기 모임 등 반복되는 일정을 캘린더에 먼저 추가하였다.
또한 주 단위로 캘린더를 정리할 시간도 2시간가량의 고정 일정으로 만들었다.
여기까지 마치면 아래와 같은 모양이 된다.
일정 공개가 어려운 관계로 흐림 처리하였다..
그리고 남은 공간을 아래의 방식으로 채워 넣었다.
채워 넣는 순서
- 이번 주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시급한 업무.
- 이번 주 내에 처리하면 좋은 업무.
-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어야 하는 업무.
- 이메일 답변 등 일상 수행 업무
채워 넣는 방식
- 업무 유형(예: 채용, 고객 인터뷰, 팀원 리뷰, 개인 업무 등)에 따라 각각의 색상을 지정.
- 처음엔 블록의 위치보다는 크기를 정하는 데 집중해서 빈 곳을 채워본다.
- 하루 최대 2시간의 버퍼(빨간색으로 표시)를 두고 남은 공간을 모두 채워본다.
- 집중이 필요한 업무는 퇴근 시간에 가깝게 위치.
- 빠르게 끝낼 수 있는 일들은 출근 시간에 가깝게 위치.
이렇게 채워 넣으면 아래와 같은 모습이 된다.
업무 예상 소요 시간을 고민하며 크기를 정하는 과정이 중요한 이유가 정확한 예측 때문은 아니다. 일의 우선순위를 정할 때 일의 크기와 가치를 기준으로 삼기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마치 제품 우선순위를 정할 때 가치(Value)와 구현 용이성(Feasibility)을 고려하는 것과 유사하다.
2시간의 버퍼를 두는 것은 예상보다 업무 소요 시간이 길어지거나 갑자기 생긴 일정을 대비하는 것이 목적이다.
3-3. 비포 앤 애프터
위 과정과 같이 한 주간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정한 뒤 그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매일 아침 오늘 할 일을 다시 점검하고 하루를 보내는 동안, 사전에 등록해 둔 각 블록의 크기나 위치는 계속해서 바뀔 수 있다.
물론 업무 방식에 따라 큰 변동이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내 경우는 일정 운영의 유연성을 지속해서 요구 받는 상황에서 중요한 일을 놓치지 않는 것이 목적이라 기존 등록된 블록의 위치와 크기가 자주 바뀌었다.
이때 '중요한 일을 하는 것'과 '실제 처리한 업무를 캘린더에 기록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명심하고 새로운 일정이 생기거나 기존 일정이 변경될 경우 즉시 캘린더에 반영하는 것을 습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캘린더 화면
현재까지 4개월 정도 위와 같이 캘린더를 활용한 개인 업무 관리를 이어가고 있는데 예전과 비교하면 훨씬 다양한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데 능숙해졌다.
비슷한 일을 함께 처리하여 시간 낭비를 줄이고 혼자 처리하기 어려운 것들은 사전에 파악하여 미리 도움을 구할 수 있게 되어 팀의 발목을 붙잡는 일도 줄어든 것 같다.
무엇보다 평생 일기 한 번 써본 적 없던 내가 꾸준히 그날그날 배운 것과 느낀 점을 기록으로 남기게 된 것이 가장 만족스러운 변화 중 하나다.
3-4. 도움되는 써드파티
어떤 일에 시간을 많이 쓰는지 확인하고 싶을 때 Calendarist
캘린더리스트는 구글 캘린더와 연동하여 각 이벤트를 태그로 분류하여 어떤 일에 얼마만큼의 시간을 할애했는지 살펴볼 수 있게 시각화해 주는 도구이다.
유연한 업무 일정 관리를 도와주는 도구 Reclaim.ai
리클레임은 앞서 소개한 캘린더 활용을 더욱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도구이다.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와 크기(range), 버퍼 등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고 직접 일정을 변경 하는데 드는 노고를 줄여준다.
4. 생산성의 중요성
앞으로 틈틈이 매니저로 일하며 배우게 된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겠다고 했는데 가장 처음 공유한 내용이 캘린더 사용 방법이라 좀 싱겁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짧은 경험이나마 돌이켜보면 역할이 달라지는 과정에서 가장 괴로운 고민 중 하나가 생산성 저하였다.
일을 통해 느끼는 만족이 클수록 그 일이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받는 스트레스가 크다.
어이없이 미팅을 놓쳤을 때 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이루 말할 수 없다. 얼마전까지 상상할 수 없던 일이 반복해서 벌어지면 사기가 저하되고 번아웃의 유혹을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생산성 증대에 가장 도움이 되었던 방법을 첫 주제로 공유하게 되었다.
앞서 공유한 내용들이 내 나름의 고민과 실험을 통해 찾아낸 개인적인 솔루션이라 생각했는데, 이후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타임박싱'이란 이름으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게재된 타임박싱 관련 아티클
그러니, 비단 매니저가 아니라도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 중 하나로 평소 활용하던 투두앱을 지우고 캘린더를 활용해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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