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IT 강국’ 이다.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터넷 속도가 빠르다.'
90년대 말 김대중 정권이 추진한 초고속 인터넷 보급 사업은 흔히 ‘IT 르네상스’라고 회자되는 대한민국 벤처황금기를 일구는데 공헌했다.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이 김대중 대통령과의 대담에서 언급했다는 말은 꽤나 상징적이다.
첫째도 브로드밴드요, 둘째도 브로드밴드요, 셋째도 브로드밴드 입니다.
어쨌건,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우리는 지금까지도 세계 최고 수준의 인프라를 누리며 많은 혜택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웹을 사용하기 좋은 환경이라면 마땅히 웹디자인* 분야의 성취도 그만큼 높아야 할 것 같은데 막상 그렇지 않아 보이는 현실이다.
사실 최근 시점에서는 디지털 프로덕트 디자인이라는 표현이 적합하겠으나 HCI/UX 등의 발전과정과 구분되므로 웹디자인으로 표기한다.
그간 어떤 일들이 있었고 무엇이 한국 웹디자인의 경쟁력을 잃게 만들었는지 함께 살펴보자.
웹디자인 태동기
90년대 초, 웹(WWW)은 얼리어답터들의 전유물이었다. 아직은 PC통신의 시대였던 당시 웹사이트는 이제 막 물 건너온 뜨끈뜨끈한 신상이었고 대학, 연구기관에서 공학도들의 탐구대상 정도로 여겨졌다.
일부 기업들이 최신 트렌드를 빠르게 받아들여 웹사이트를 만들었지만. 대게 텍스트와 이미지를 위에서 아래로 나열한 문서에 가까웠다.
90년대 중반, 인터넷 보급에 속도가 붙으며 웹사이트를 구축하는 기업의 수도 크게 증가했는데. 당시 웹디자이너/웹마스터가 새롭게 등장한 유망 직업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참고로 이쯤의 웹사이트는 대게 테이블로 레이아웃을 만들고 이미지로 화면을 꾸미는 형태가 많았고 아직 도입 초기였던 CSS 대신 자바스크립트를 활용해 텍스트 효과나 색상을 입히는 수준이었다.
1996년의 워싱턴 포스트 웹사이트와 현재의 웹사이트:
웹디자인 전성기
2000년대에 들어서며 초고속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고. 지금 스마트폰이 그렇듯 ‘1가정 1회선’ 인터넷 시대가 열렸다.
전화선에 모뎀으로 꾸역꾸역 기다려야 화면 하나 볼 수 있던 상황이 급변했다.
기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웹사이트 구축에 열을 올렸고 일반인 사이에서도 홈페이지 제작 열풍이 불었다.(스마트폰 초기의 앱 제작 열풍을 떠올려보자)
그야말로 새로운 시장이 등장한 셈이고 알려진 많은 에이전시들이 이 시기에 생겨났다.
젊고 트렌드에 밝은 디자이너들은 새로운 분야로 주저없이 뛰어들었다. 잘 알려진 JOH 조수용 대표, 배달의 민족 한명수 이사도 당시 웹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렸다.
이때쯤의 주목할 만한 트렌드를 꼽자면 플래시의 등장을 들 수 있는데, 초기에는 GIF 포맷의 부족한 애니메이션 효과를 극복하기 위해 사용되던 것이 점차 발전하여 다양한 인터랙션을 제공하는 차세대 뉴미디어로 자리매김 하였다.
당시 해외의 대표적인 디자이너로는 조슈아 데이비스, 유고 나카무라, 존 마에다 등이 있으며 국내에선 포스트비쥬얼의 설은아 대표가 이름을 날렸다.
현재의 인터랙션 디자인 분야가 전문적인 영역으로 자리 잡는 데에는 플래시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유고 나카무라의 인터랙션 아트웍
광고 매체로서의 웹
상호 소통이 가능하면서도 다양한 시각효과 그리고 강력한 멀티미디어를 지원하는 플래시는 기업들이 웹사이트를 매력적인 광고 채널로 인식하게 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등장한 것이 흔히 마이크로사이트로 불리는 마케팅 웹사이트인데, 기존 기업 웹사이트/서비스와는 별개로 신제품 출시나 이벤트 홍보를 위한 위성 사이트로 볼 수 있다.
일반적인 기업 웹사이트가 컨텐츠/채용 관리 등 복잡한 시스템과의 연동 및 이를 담기 위한 설계과정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에 비해 마이크로사이트는 구축 기간과 비용이 상대적으로 적고, 무엇보다 판매 촉진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기업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2002년 칸 국제광고제 은사자상을 수상한 영화 취화선의 웹사이트 — 디자이너 권혁 (All-M 이사)
무엇보다 우리 인터넷 환경에서는 화려한 효과와 대용량 멀티미디어 사용에 어떤 제약도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많은 규모의 마케팅 예산이 온라인 광고에 몰리기 시작했고 전후 벤처 버블 붕괴로 위기를 겪고 있던 웹디자인 업계의 상당 부분이 광고 산업에 종속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는 한국 웹디자인 산업 전후를 가르는 중요한 분수령으로 볼 수 있는데 웹디자인 산업이 기술 중심에서 미디어 중심으로 성장 엔진을 바꿔 달았다는 점과 기업, 에이전시 사이에 광고 대행사가 자리하는 본격적인 ‘갑.을.병’ 시대가 열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전글 참조)
이후 많은 기업이 온라인 광고시장에 뛰어들었고 미대 졸업생들은 웹에 대한 전문 지식 없이 현장에 투입됐다.
복잡한 구조를 다뤄야 하는 대규모 웹사이트 혹은 웹서비스에 비해서 이미지 중심, 단순한 구조의 마케팅 사이트 제작은 대게 그래픽 디자인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디자이너의 역할은 철저히 시각화(모션그래픽/GUI)에 집중되었다.
기술은 효율에 집중하고 광고는 효과에 집중한다.
디자이너의 역할 축소
2009년 시드니의 웹에이전시에서 1년 가량 근무한 적이 있다. 대기업 웹사이트 구축이 주된 업무였고 하는 일 자체는 한국에서와 크게 다를바 없었지만 단 하나의 차이가 과정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최적화’ 과정으로,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당시 호주는 인터넷 종량제가 보편적이었고 쓰는 만큼 돈을 내야하는 사용자들에게 웹사이트의 ‘용량은 곧 돈’ 이었다. 그러니 제작 과정의 A부터 Z까지 최적화는 매우 중요한 과제일 수밖엔 없었다.
한국에서는 메가바이트 단위의 에셋을 사용하던 작업이 호주에선 킬로바이트 단위도 모자라 1byte라도 더 줄이기 위해 시간을 사용해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은 국내 에이전시에서 일해온 내게는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항상 최신 기술 동향을 체크하고, 색상과 이미지를 다루는 일에도 브라우저 호환성, 용량 비교 등 사소한 것 하나하나 꼼꼼히 비교하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은 커뮤니티를 통해 공유되고 새롭게 재생산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디자이너는 필연적으로 기술 친화적일 수 밖에 없는데, 당시 함께 일하거나 알게된 디자이너 대부분 기술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는 물론 코드 사용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위 경험으로 느낀점은 해외의 경우 웹디자인에서 ‘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반면 국내의 경우 ‘웹이 빠진 디자인'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한 그룹은 HTML5 / CSS3 를 만들어냈고 다른 한 그룹은 웹 기획자를 만들어냈다.
웹기획자의 등장은 디자이너의 역할을 ‘그리는’ 일로 결정짓는 쐐기였다.
디자인의 범주에 포함되던 설계 업무를 기획과 디자인으로 나누어 구분하면서 ‘디자이너=미대 출신’이란 인식이 굳어졌고, 태생부터 다학제적이며 기술 친화적인 UX 디자인의 개념이 국내에 안착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만 했다.*
웹기획자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이를 충분히 포괄할 수 있는 형태로 자리 잡았어야 했다는 생각이다.
또한 기획/디자인/개발이 각자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업무 환경은 커뮤니케이션 비용을 높인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기형적인 구조는 서로의 언어를 번역하는데 많은 시간을 쏟게 만들었다.
스마트폰, 스타트업 그리고 응답하라 1999.
혜성처럼 나타난 스마트폰은 많은 것을 바꾸었다. 언제 어디서나 웹을 사용할 수 있는 모바일 환경은 마치 웹 초창기가 그랬듯이 스타트업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IT 창업 열풍을 불러왔고, 이는 단순히 IT분야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치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IT기업, 혹은 글로벌 경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여러 기업은 자사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기존의 기형적인 제작환경을 개선하고 구성원의 역량 증진을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디자이너 역시 변화의 물결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각종 포럼, 세션 등을 통해 자발적으로 실무 노하우를 공유하거나, 새로운 기술을 누구보다 빠르게 캐치하고 열띤 토론을 이어간다.
웹 디자이너는 웹을 넘어서 디지털 프로덕트를 다루고, 디지털은 생활 곳곳에서 라이프스타일을 바꿔가고 있다.
기술은 끊임없이 변하고 그때마다 디자이너는 적절한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나는 그동안 개발자들의 오픈소스/커뮤니티 문화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다. 그 안에서 이뤄지는 생산적인 토론과 그것들이 만드는 변화. 그리고 기여하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어찌 보면 디자이너에게도 과거 한 번 쯤의 기회는 있었던 것 같지만 외부, 혹은 우리 자신의 사정으로 그 기회를 적절히 활용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앞으로 마주할 많은 변화 앞에서 디자이너는 스스로의 역할 범위를 보다 넓게 설정하고. 나의 노하우, 나의 포트폴리오, 나의 아이디어 등 ‘나' 의 것을 쌓는 노력과 더불어, 함께 나눌 수 있는 정보 생산을 통해 생태계 발전에 기여하는 문화가 널리 자리매김 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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