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에이전시에 대한 생각

디자인 에이전시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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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11년 6월 1일 작성된 글을 옮긴 것입니다.

한국 디자인 신 홍길동 뎐

옛날 옛적 한국이란 작은 나라에 홍길동이라는 이름의 착한 디자이너가 살고 있었다. 낮이건 밤이건 가리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3D 천민’이라 부르며 가여히 여기었다.. 때때로 성질 고약한 ‘갑’들이 그를 멸시하며 손가락질하기도 하였으나. 남들이 뭐라건 개의치 않고 열심히 일하였고, 환갑이 되었을 무렵 꿈에 그리던 자신의 집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이 더 이상 세월을 버티지 못하리라는 것을….

언제나 그렇듯 ‘미래’란 단어는 설렌다. 마치 스펙타클 한 모험이라도 펼쳐질 것처럼 사람을 기대에 부풀게 하는 힘이 있지만…

졸업을 앞둔 후배들이 일러주는 자신의 미래:

“대기업이나 포털 지원해 보고 안되면 대학원이라도 갈까 봐요..” “…”

틀로 찍은 듯 똑같은 답을 몇 번이고 듣다 보면 낭만 운운하기에는 세상이 각박해졌나 보다.. 당연히 대기업, 포털, 대학원 모두 다 훌륭한 선택임에 분명하다. 다만.. 그들의 뉘앙스에서 전달되는 ‘선택의 기준’이라는 것이 대체로 ‘어떤 일을 하는가’ 보다는 ‘조건, 대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 조금 아쉬울 따름이다.

그리고 이내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누구도 소위 ‘디자인 전문 회사’라고 불리는 곳에 가고 싶단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겪었던 몇몇 회사들을 떠올려본다.

"그래 그게 좋겠어!! 파이팅!!"

image.png 지금은 추억이 되어버린 임프레스의 ‘월간 웹디자인’

2000년대 초 디자인 잡지에 실린 ‘O그래픽스’, ‘홍디자O’, ‘OOO비상’, ‘에프아O디’, ‘O이널’, ‘O자인 블루’, ‘O스트릭트’ 등의 인터뷰와 기사를 스크랩하며 꿈을 키우던 시절이 있었다.

디자인 좀 한다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잘 나가는 디자인 회사에 입사했고 업계 소식은 다양한 커뮤니티를 통해 금세 퍼져나갔다.

그러나 웬일인지 디자이너를 장래희망으로 적어내고 회사 이름을 달달 외우는 ‘디자인 키드’를 찾기 어려울뿐더러, 디자인 회사의 이미지는 ‘박봉에 야근 많은 최후의 보루’로 전락해버렸다.

단적인 예로 내 첫 직장이던 한 에이전시의 ‘2005년도 신입 초봉’과 근래 제법 알려진 다른 에이전시의 ‘올해 신입 초봉’을 비교해 보면 얼추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약 500만 원가량 낮아졌다. 같은 기간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음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근무강도가 낮아졌을까? 아쉽지만 여전히 디자인 회사의 창가는 새벽까지 훤하다.

언젠가 함께 일하던 선배가 건넨 말이 떠오른다.

‘야 요즘 들어오는 애들은 깡다구가 없지 않냐? 우리 땐 몇 달씩 회사에서 먹고 자고 했는데 말이야..’

그 선배는 얼마 뒤 모 대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야 후회하지만 그때 뱉지 못했던 말이 있다.

‘선배가 개고생 했으면 후배들은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게 해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소위 기자들의 사쓰마와리 같은 도제 문화, ‘좀 굴러봐야 한다’ 식의 업무 환경은 많은 폐해를 불러왔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인재들이 업계를 기피하는 형국을 자초한 셈이다.

물론 디자인에 대한 열정 하나로 험난한 과정을 헤쳐 온 업계 선배들을 존경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땀과 노력을 그 자신의 커리어 가꾸기에 쏟아붓는 동안 ‘디자이너 커뮤니티’는 얼어붙었고 ‘디자이너’는 기피 직종이 되어버렸으며, ‘디자인 전문회사’의 위상은 땅바닥에 떨어졌음을 부정할 수 없다.

본디 ‘디자인 전문 회사’라고 명명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디자인 전문가들이 모여있는 회사이기 때문이다. 즉 그곳에 일하는 사람들은 너무도 당연히 ‘디자인 전문가’ 여야 하지만. 실상은 술자리에서 푸념하는 게 그나마의 낙이 되어버린 삶이다.

피로에 지치고 걱정에 찌들고… 그러다 보니 이름뿐인 ‘전문’을 떠나서 ‘인하우스’를 찾게 되는 것이고. 그간 쌓아온 노하우는 고스란히 대기업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전문’ 회사는 새로운 디자이너를 찾아야 하고 말이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반복이다.

image.png

그렇다면 ‘박봉’에 ‘야근’으로 디자이너들을 떠미는 ‘못된 사장님’을 원망하면 되는 걸까? 그저 그들에게 욕 한 바가지 시원하게 쏟아부으면 모든 일이 없던 것처럼 해결될까?

사실 그들 역시 궁지에 몰려있긴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 디자인 회사가 존재할까? 300개? 500개?.. 2013년 기준으로 전국에 약 4000개가량의 디자인 회사가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내가 알고 있는 적지 않은 수의 회사는 모두 삼성, LG, CJ 등 몇몇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일을 수입원으로 삼고 있다.

즉 밥상에 수저는 많은데 돌려먹을 찬은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공급이 수요를 과히 넘어서면 시장 가격은 바닥을 친다.

대학에서 매년 쏟아져 나오는 디자이너의 수가 약 2만 5000명 그리고 10년 사이에 4배가량 증가한 디자인 회사들 그러나 늘지 않는 디자인 수요…

image.png "출처 :디자인 진흥원 (2011)"

줄어드는 수입은 당연히 R&D 등 역량강화에 악영향을 미치며 이는 전문성 악화로 이어진다. 결국엔 ‘주던 곳’의 ‘하던 일’을 묵묵히 하는 것 만으로 힘들게 버티는 형국이 되어버린다.

‘하던 일’을 반복하던 디자이너는 지쳐 떠나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제는 세계시장으로 눈을 돌린 ‘주던 곳’ 들이 ‘충분한 전문성을 갖춘’ 해외 디자인 기업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풍전등화가 따로 없는 형국이다.

여기까지 와보니 결국 디자이너를 괴롭히는 적은 ‘디자인에 대한 낮은 수요’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늘리면 될 게 아닌가? 수요만 늘어나면 자연스레 돈이 돌 테고 그 수익을 직원 복지와 역량 강화에 쓰고, 만족스러운 환경에서 즐겁게 일하는 디자이너의 노하우는 고스란히 ‘전문성’으로 이어진다니 정말이지 이렇게 완벽한 시나리오가 따로 없다.

그러나 다시 원점에서 ‘디자인 수요를 어떻게 성장시킬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그저 막막할 따름이다..

image.png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하나..

우리는 60–90년대 급격한 성장을 거치며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만들어왔고 이로 인해 경제의 허리라고 할 수 있는 중소기업의 세가 매우 약하다, 그마저 대부분이 제조업 중심, 대기업 하청 위주의 기업들이다 보니 디자인, 마케팅의 필요성을 체감하는 일이 쉽지 않을뿐더러, 설사 디자인의 필요성을 느낀다 하여도 대기업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예산을 달가워할 디자인 회사들이 많지 않다.. 결국 수 많은 관계들이 얽히고설켜서 쉽사리 풀 수 없는 지경인 셈이다.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고 별 도리없이 포기해야 할 것 같아 보인다..

그래도 어쩌면..

일말의 희망에 의지해 얽힌 실을 찬찬히 풀다 보면 그야말로 ‘실마리’가 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다행히도 근래의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신호’ 들이 통해 어렴풋이나마 실의 끝자락을 엿볼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스타트업이라는 이름의 초기기업들의 성장이 허리가 무너진 우리나라 경제의 빈자리를 메워줄 수 있을지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앞으로 수 번의 포스팅을 통해 여러 가지 생각들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 이와 관련해 앞으로 함께 고민해 보면 좋을 몇 가지 질문을 나열하며 급하게 마무리해본다.

질문

디자이너 개인 관점

  1. 쌓아온 직무 역량이 개인의 발전에 국한되지 않고 생태계 발전을 위해 공유될 수 있을지?

  2. 관성에 따라 디자이너 스스로 자신의 역할과 범위를 한정 짓고 있지는 않은지? 빠른 산업 변화 속도에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지?

디자인 기업 관점

  1. 수익구조 개선을 통해 구성원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 아웃소싱 만이 정답일까?

  2. 글로벌 시장 진출을 통해 내수 시장에서의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날 때가 된 건 아닐지?

사회 전반의 관점

  1. '디자이너’ = ‘미대’에 대한 구시대적인 역할 정의는 적절한가?

  2. 디자인 교육자 및 학자들이 만드는 커리큘럼이 산업 성장 속도를 따라잡고 있는가?

  3. 정부의 제도적 지원 장치들이 실재하는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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