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년 메아리
매년 새해가 되면 기존의 나쁜 습관을 고치거나 새로운 좋은 습관을 갖고 싶어지는 게 나만의 얘기는 아닐 것 같다. 그리고 몇 주쯤 지나서 일, 혹은 다른 핑곗거리로 신년의 결기는 메아리처럼 희미해지다가 결국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던 기억도 나만의 것은 아닐 거다.
예를 들어 책 읽기나 글쓰기는 몇 년간 새해 다짐에 빠지지 않고 포함되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게다가 늘 핑계는 같았다. '일이 바빠서….'
그런데 내가 바쁘면 얼마나 바쁘다고? 빌게이츠도 책은 꼬박꼬박 잘만 챙겨 읽던데?
책 읽기는...
출퇴근 길에 업계 관련 뉴스 기사나 아티클을 읽는 습관이 되어 자연스러운 데 비해 그 시간에 책을 읽다 중간에 한 번 끊고 나면 다시 열어보게 되지 않았다. 그럼 한 번에 집중해서 볼 시간이라도 마련해야 했는데 그정도로 읽고 싶은 책이 없으면 흐지부지하다가 한 해가 끝나버리곤 했다.
글쓰기는...
글은 회사나 집이나 여러 목적으로 많이 쓰기야 하지만. 블로그 관리를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방치한지 오래다.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느 순간부터 잘쓴 글을 올려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쓰고 싶은 내용이 생겨도 글을 쓰는데 들여야 할 에너지를 떠올리며 이내 포기하게 되었다.
2. 습관 고리에 올라타기
왠지 올해는 꼭 오랜 기간 반복되어온 나쁜 패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이 패턴을 깰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신년 목표를 잘 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치 일하는 것 마냥 갖고 싶은 습관을 목록으로 만든 뒤 가치(Value)와 실행 가능성(Feasibility) 을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고 2x2 우선순위 매트릭스를 만들었다. 😅
- 가치: 이 습관을 갖는다면 내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 실행 가능성: 그것을 하는 데 얼마나 적은 노력이 들까?
2x2 매트릭스로 우선순위를 비교해보니 올해의 신년 목표로 TIL(Today I Learned)이 당첨되었다. 그날그날 새롭게 배운 것과 느낀 것을 기록하는 습관이다.
예전에 Thoughtbot에서 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한동안 잊고 살다가 작년 말 팀에 새로 합류한 동료가 꾸준히 TIL을 기록하고 있단 말에 다시 관심이 생겼다.
목록에 있던 여러 신년 목표 중에서 TIL이 선택된 이유는 작년부터 업무/시간 관리를 위해 꾸준히 타임박싱을 활용해왔는데 그 경험으로 약간의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타임박싱에 대한 경험은 아래 글에 상세히 적어두었다.
찰스 두히그는 그의 저서 습관의 힘(The Power of Habit)에서 습관 형성의 메커니즘, 즉 '습관 고리'를 만드는 방법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신호(Cue) -> 반복행동(Routine) -> 보상(Reward)
하나의 행동을 습관으로 만들려면 위 사이클이 계속 돌아가는 게 중요한데 타임박싱에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보상 역할을 한 것은 '나의 하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색색이 빼곡하게 화면을 채운 모습을 보며 느끼는 보람이 습관 형성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미 캘린더를 중심으로 습관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TIL 역시 캘린더를 활용하여 기존에 돌고있던 데일리 루틴 위에 살포시 얹으면 될 것 같았다.
이렇게 나의 새로운 신년 목표는 '매일 배운 것을 기록'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3. 난이도 설정하기
심리학자 로버트 여크스(Robert Yerkes)와 존 도슨(John Dodson)이 고안한 여크스-도슨 법칙에서는 정신적 각성 정도와 성과 사이의 관계를 아래 이미지의 종 모양 곡선으로 설명한다. 즉, 목표를 너무 낮게 잡으면 동기부여가 되지 않아 역량을 끌어낼 수 없고 반대로 너무 높게 잡으면 성과에 대한 압박으로 인해 역량을 다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올해는 새로운 습관을 꾸준히 이어가는 게 가장 중요한 만큼 지나치게 빡빡한 규칙을 정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래서 TIL 유지를 위한 최소 달성 조건을 아래와 같이 정했다.
- 주말과 공휴일, 휴가 기간을 제외한 근무일에만 작성한다.
- 적어도 오늘 내가 한 일, 그때 들었던 느낌과 감정은 꼭 기록한다.
- 매일 새롭게 배운 것이 무엇인지 떠올려 보고 짧게 기록하되, 없다면 억지로 적지 않는다.
자, 이 정도 난이도라면 꾸준히 하는게 아주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업무와 직접 연관되어 있으니 일 핑계로 흐지부지 될 일도 없을 것 같고 말이다.
4. TIL 100일 차 진행 현황
그렇다면 현재까지의 결과는?
아직까진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보라색 선명한 부분이 TIL을 작성한 항목이다.) 1월 1일 이후 모든 근무일엔 퇴근 후 TIL을 꼬박꼬박 작성하고 있는데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하루를 기록하는 것이 일상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독서량이 늘고 학습 기록을 하게 되었다
원래 일에 직접 도움되는 내용이 아니면 책 읽는 시간이 조금 낭비처럼 느껴졌는데, 마침 올해 들어 조직 문화와 성과에 대한 관심이 커져서 예전에 읽다만 책을 다시 읽거나 주변 분들에게 추천받은 책을 한 권 두권 꺼내 읽었다.
원래대로라면 책을 읽고 끝났을텐데 TIL덕에 인상 깊은 내용이나 새로 배운 것을 기록하게 되었고 배운 것들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쌓이는 느낌이 좋아서 책을 읽거나 일을 하다 배운 새로운 지식과 정보는 캘린더가 아닌 별도의 노트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또 이렇게 정리하다 보니 또 새로운 책을 찾아 읽게 되고 느리지만 꾸준히 읽게된다. 물론 아직 습관이 되었다고 하기에는 불안한 상태여서 한동안 더 의식적으로 노력해보려한다.
블로그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올 초부터 이 글을 포함해서 총 12개의 글을 블로그에 게재했다. 그 이전 3~4년간 올린 글의 수와 엇비슷하다.
이것도 TIL과 학습 노트를 꾸준히 기록하며 자연스레 관심 가는 주제가 생기고 그걸 글로 옮기거나 혹은 그 과정에 읽었던 좋은 글을 번역하게 되었다. 물론 잘 써야한다는 욕심을 내려놓은 게 크게 한몫했다.
개인 회고의 질이 높아졌다
원래 월말이 되면 캘린더에 추가된 업무를 살펴보며 개인 회고를 했는데 종종 기억나지 않는 일도 있고, 회고의 주된 내용도 업무 방식과 퍼포먼스에 집중되었다.
그런데 그날 했던 일과 그에 대한 생각, 감정을 함께 기록하니 회고의 범위가 당시 했던 업무뿐 아니라 관계나 태도, 습관 등 개인적인 영역까지 넓어졌다.
회고의 범주가 넓어지니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되고,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주기적으로 동료 리뷰를 부탁하고 있다. 그럼 또 피드백을 통해 새로 배우는게 있다.
재밌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란 점이다. 마치 플라이 휠을 돌리는 기분이랄까?
5. 방심 금물
이제 100일이 갓 지났다. 작년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지만 아직 260일이나 남았다. 방심하기에는 남은 날이 너무 많다. 지금 이 글을 적는 이유도 공개적으로 다짐해두면 쪽팔려서라도 꾸준함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다음 TIL 진행 상황 보고는 6월 말쯤이 될 것 같다.
과연 그때 가서 뿌듯한 감회를 적게 될지, 부끄러운 반성문을 적게 될지 아직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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